한 나라의 민족성에 대해 논하는 것은 언제나 부담스러운 일이다. 지금만 해도 무려 오천만명, 게다가 지난 백 년 동안 이 나라에 이 나라 국민으로 살았다가 죽어간 사람까지 합하면 못 잡아도 족히 일억명은 넘을텐데. 무슨 도리로 이 엄청난 쪽수의 군집에서 몇 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 보편적 서술어를 찾는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떠오르는 느낌은 있다. 최소 일주일에 한 번, 오 년 이상 비슷한 내용이 머리속 가슴속에서 반복된다면 그것은 최소한 (나의 의견이 편견에 가까울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은 한) 그 내용을 나 아닌 다른 사람과 이야기해볼 수준은 된다는 생각이 좀 든다. 아, 한국인들은 이렇구나. 이런 점에서 다르구나. 단견, 단상이라 할지라도 이백오십번 넘게 반복되면 내가 외계인이 아닌 한 진실과 100% 거리가 멀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내가 보는 한국인은, 일단 좀 불쌍하다. 해먹을 게 없는 땅에서 태어났는데 워메- 사람은 왜 이리 많아. 영토 및 자원에 비해 인구밀도가 엄청나게 높다. 사실 이렇게까지 자손을 많이 남긴 것도 나름대로 대단한 일이다. 이 정도 상대적인 인구 규모를 유지하지 못했다면 중국(한족, 거란, 여진 모두를 포함하여)에 벌써 병합되었을 것이다. 문화적 정체성이란 것은 공동체가 최소 규모를 유지할 때에야 비로소 생기는 것인데, 아슬아슬하게 그 최소 규모를 유지한 채 몇 천 년 이어온 점은 높이 살만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불쌍한 처지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삼십 명이 그럭저럭 먹고 살만한 구역에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 살고 있으니, 올해 굶어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머리를 굴릴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지능과 꾀라는 부분에서는 상대적으로 강해지겠지. 영토가 넓은 것도 아니고, 맹수가 많은 것도 아니며,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치명적인 자연재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먹을 게 없다. 즉 나와 내 식구들 먹을 걸 빼앗아갈 수 있는 건 다름 아닌 사람이다. 그것이 이웃이 되건, 도적이 되건, 지방 유력자가 되건, 중앙 관리가 되건 말이다. 귀신보다 사람이 무서운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한국인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타인에 신경을 집중할 수밖에 없다. 타인과민증, 관계과민증이 안 생길 수가 없다.
타인에 많이 신경을 쓰다 보면 나와 저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든 우호적으로 형성하는 게 중요하다.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려면 '나는 네 편, 너는 내 편'이라는 인지를 시킬만한 (사실은 별로 중요할 거 없는) 꺼리를 가능한 한 많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 가장 손쉽게 들이밀 수 있는 꺼리는 혈연과 지연이다. 난 누구누구의 아들인 누구누구의 육촌 당숙의 외가쪽 혈통이오(유전자가 비슷할 확률은 1%도 안 된다). 아이구, 당신 아버지가 살던 곳은 내 고향에서 개천 두 개만 건너면 갈 수 있는 곳이오(사실은 강 두 개를 건너야 한다).
인구밀도가 포화상태에 이른 곳에서는 다수파에서 밀려나는 쪽은 아주 쉽게 죽을 수 있다. 나 혼자로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Lone wolf hero는 땅덩이 넓은 제국이나 유목민 사회에서나 가능한 얘기다) 어떻게든 내 편, 내 패거리, 내 집단을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이상 한국인들의 몸에 남의 눈치를 보는 습성이 과도하게 배는 건 당연한 귀결이다. 적인지 아군인지, 내 편인지 아닌지를 재빨리 가늠하는 눈이 없으면 순식간에 도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도태되면 나와 내 식구가 먹을 게 없어진다. 그래서 다들 눈에 불을 키고 다른 사람 눈치를 본다.
모두들 처절한 노력을 해야지만 겨우 살아남는 분위기가 아니라, 적당적당히 해도 내 땅 찾고 내 집 짓고 내 식구 먹여살리며 살아갈 수 있다면 옆사람이 뭘 하건 크게 상관할 필요가 없다. 저 사람이 노골적으로 나를 공격하지만 않으면 나와 내 식구 생존은 위협받지 않으므로. 하지만 다들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겨우 굶어죽지 않을 정도의 빈곤한 생계가 유지된다면, 다들 없기 때문에 누군가 한 명 좀 남는 게 있으면 아주 쉽게 눈에 들어온다. 아니, 우리집하고 개똥이네 말순이네는 모두 소 한 마리 송아지 두 마리 닭 세 마리인데 저기 돌쇠네만 작년부터 소 두 마리 송아지 세 마리 닭 다섯 마리네. 어쩌다가 이렇게 됐나. 왜 쟤네만 저렇게 잘 살게 됐나. 이웃인데 좀 나눠줘야 하는 거 아닌가. 저 돌쇠놈 덕 좀 톡톡히 보지 않으면 이 내가 배 아파서 못 살겠네.
이러한 구조에서 남의 일에 지나치게 관심을 가지고 심하게 간섭을 하는 성향, 그리고 물질적인 것을 비롯하여 사회 전반에서 질투심 레벨이 올라가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내가 당장 배부르면 돌쇠네 황소가 두 마리가 되건 세 마리가 되건 크게 상관할 바가 못 된다. 오히려 이웃이 잘 되면 언젠가는 내가 도움받을 여지도 늘어나니 같이 좋아할만한 일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당장 배고프고, 올해 농사가 흉작이면 내년에 당장 굶어죽을 수 있는 상태라면, 지금까지는 비슷한 처지였던 이웃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일종의 빈곤 알러지랄까. 불쌍하다는 말이 안 나올 수가 없다. 요즘 기준으로 말해서, 적당히 일해도 월에 삼사백은 벌고 한 오년만 일하면 어렵지 않게 정원 딸린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다면, 그리고 가장 가까운 이웃집과의 거리가 최소한 50m라면, 이 정도로 남일에 신경쓰고 눈치보고 질투하는 민족성이 형성되었겠느냐는 말이다.
제정 러시아와 조선 후기 서민들의 삶은 모두 비참했다. 있는 자들이 없는 자들의 고혈을 쥐어짜는 고질적인 구조가 조금도 수정되지 않은 채 몇 백 년 동안 유지되며 계속 악화되기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만들어져 지금 남아있는 문화재나 유적이 별 게 없다. 몇 가지 내놓는다고 해도 러시아나 중국의 것에 비하면 아기자기하다 못해 초라할 지경이다. 그렇다고 기술 수준 자체가 그쪽에 비해 떨어지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조선시대의 건축, 세공 기술은 모두 상당한 수준에 달한 상태였다. 남는 건 결국 자원의 문제다. 기술은 있지만 자원이 부족하다- 쪽수에 비해 땅덩이가 좁아서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단순한 발상일까? 슬프지만 단순하지는 않은 문제다. 영토가 넓고 좁다는 건 그렇게 간단한 명제가 아니다. 영토 및 인구밀도에 좌우되는 자원과 산물의 포텐셜 차이는 실로 엄청나기 때문이다.
서민이 겨우 먹고 살만한 재력을 1 유닛이라고 했을 때, 제정 러시아와 조선 후기의 사회 지도층은 서민들에게 0.8 (혹은 그 이하) 유닛 정도만을 남기고 그 이외의 모든 산물을 깡그리 갈취했다. 다만 지도층이 생계를 해결하고 남은 잉여 산물이 조선은 일억 유닛 정도라면 제정 러시아는 삼백억 유닛에 달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 삼백억 유닛을 가지고 러시아는 아무 것도 없던 늪지대에 상트페쩨르부르크라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도시를 건설했고, 여름궁전과 겨울궁전을 나눠지었고, 에르미따쥐 미술관을 만들었다. 영토와 자원의 차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다. 좁은 땅에 갇혀 빡빡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로서는 '이렇게 해 보자'라는 발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 아닐까. 도성 한구석에 고작 기왓집 아흔아홉채 구겨넣었다고 거부라는 소리를 들으며 주위사람들의 부러움과 질시를 사는 환경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약 이백오십번 반복되었던 생각은, 작년에 러시아를 다녀오면서 이와 같이 굳어지게 되었다. 쪽수도 중요하지만, 땅덩이라는 게 이렇게나 대단한 변수였구나.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 자체를 다르게 만드는 거였구나. 한국인에 대한, 한국인으로서 느끼는 자괴감이 연민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